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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 : 희대의 거장인가, 망국의 친일파 인가

by 박군Jr 2023.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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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

 

정율성, 한국 음악의 거장

 

정율성은 한국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목포의 눈물>, <고향>, <춘향전> 등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그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며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노래한 예술가였다.

 

프로필

 

정율성(鄭律成, 191691~ 19551018)은 대한민국의 작곡가이다. 본명은 정율용(鄭律庸)이며, 호는 율사(律師)이다.

 

1916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1930년대부터 작곡 활동을 시작했으며, <새벽길>, <고향의 노래>, <동무생각>, <아리랑>, <강원도 아리랑>, <봉산탈춤>, <춘향전>, <심청전> 등 많은 명곡을 작곡했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조선민족예술전람회와 자유음악가협회 등에서 활동했으며, 1948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군 군악대장을 맡아 전선에서 군인들을 위로하고 사기를 높였다. 1953년 휴전 후에도 음악 활동을 계속하다가 195510183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정율성은 한국 민요와 서양 음악을 접목한 새로운 음악을 창조한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음악은 한국인의 정서와 감성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한국 음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업적

 

정율성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며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노래한 예술가였다. 그의 대표곡은 <목포의 눈물>, <고향>, <춘향전>, <애수의 소야곡>, <사랑의 샘물>, <가시나무>, <새야 새야> 등이다.

 

<목포의 눈물>1936년 발표된 곡으로, 일제 강점기의 서러운 현실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 곡은 발표와 동시에 큰 인기를 끌었고, 지금까지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 중 하나로 손꼽힌다.

 

<고향>1941년 발표된 곡으로, 한국 전쟁 중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작품이다. 이 곡은 한국 전쟁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춘향전>1945년 발표된 곡으로, 한국 전통 음악에 서양 음악을 접목한 작품이다. 이 곡은 한국 전통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율성의 업적은 크게 세 가지의 관점으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그는 일제 강점기의 서러운 현실과 한국 전쟁의 고통을 노래한 시대의 애가(哀歌)를 남겼다. <목포의 눈물>, <고향>, <춘향전> 등 그의 대표곡들은 한국인의 애환과 희망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둘째, 그는 한국 전통 음악에 서양 음악을 접목하여 한국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춘향전>, <애수의 소야곡>, <사랑의 샘물> 등 그의 작품들은 한국 전통 음악의 아름다움과 서양 음악의 화려함을 조화롭게 결합한 작품으로, 한국 음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셋째, 그는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책임감도 강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운동에 참여했고, 한국 전쟁 중에는 피난지에서 공연을 열어 전쟁 고통을 달래는 데 힘을 보탰다.

 

특이한 에피소드

 

-우연히 쓴 노래가 대히트

정율성은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민족음악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조선민족음악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모여 작품을 만들기로 했다. 정율성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슬픈 시를 지어냈다. 그는 이 시를 가지고 멜로디를 붙여 노래를 만들었는데, 이 노래가 바로 <목포의 눈물>이다.

<목포의 눈물>은 발표와 동시에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노래는 일제 강점기의 서러운 현실을 노래한 작품으로, 한국인의 애환을 대변하는 노래로 사랑받았다.

 

-자신의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정율성은 자신의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1945, 정율성은 한국 전쟁 중에도 피난지에서 공연을 열었는데, 어느 날, 그는 피난지인 부산에서 공연을 하던 중, 자신이 작곡한 <목포의 눈물>을 부르기 시작했다.

정율성은 자신의 노래를 들으며, 일제 강점기의 서러운 현실과 한국 전쟁의 고통을 떠올렸고, 그는 자신의 노래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무명 가수의 노래를 작곡

정율성은 무명 가수의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1940년대, 정율성은 조선성악연구소에 재직하고 있던 어느 날, 그는 조선성악연구소의 한 학생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감탄했다. 그는 그 학생의 노래를 듣고, 그 학생을 위해 노래를 작곡해 주었다.

이 노래가 바로 <애수의 소야곡>이다. <애수의 소야곡>은 발표와 동시에 큰 인기를 끌었고, 무명 가수였던 그 학생을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이러한 특이한 에피소드들은 정율성이 단순한 음악가였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시대를 이끌어가는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정율성 공원논란

 

201910, 서울시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 정율성 공원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정율성 공원에는 정율성의 동상과 기념관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발표에 대해 일부 시민들은 반발했다. 그들은 정율성이 일제 강점기 친일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공원 조성을 반대했다.

이에 서울시는 정율성의 친일 행위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전문가 자문단을 구성했다. 자문단은 정율성이 일제 강점기 친일 가요를 작곡했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그가 항일 활동에도 참여했다는 점을 감안해 공원 조성을 최종적으로 찬성했다.

 

정율성 공원 조성 논란의 주요 쟁점

 

정율성 공원 조성 논란의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다.

-정율성의 친일 행위의 정도와 영향력

-정율성의 업적과 친일 행위의 상관관계

-정율성 공원의 조성이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

이러한 쟁점을 중심으로 정율성 공원 조성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친일 행위의 정도와 영향력을 인정해야 한다

일부 시민들은 정율성이 일제 강점기 친일 가요를 작곡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며, 그의 친일 행위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가 작곡한 친일 가요들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기여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의 친일 행위의 영향력이 컸다고 주장한다.

 

친일 행위와 업적을 분리하여 평가해야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정율성의 친일 행위와 업적을 분리하여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정율성이 작곡한 친일 가요가 식민지 지배에 기여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의 다른 업적은 한국 음악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의 친일 행위만을 강조하여 공원 조성을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공원 조성이 한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정율성 공원 조성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공원이 한국 음악의 발전과 역사 교육에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정율성 공원이 한국 음악의 거장인 정율성을 기념하고, 한국 전통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또한, 공원이 한국 사회의 역사 인식을 높이고, 올바른 역사 교육에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정율성 공원 조성은 정율성의 업적을 기념하고, 한국 음악의 발전을 위한 의미 있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공원 조성이 한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아니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논의될 것이다.

 

정율성 월북 사건

 

  정율성의 월북 사건은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정율성은 19531222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좌익 성향의 무당"으로 매도되는 기사가 실리면서, 결국 195411일 자진 월북을 선택했다.

 이 사건은 아래의 세가지와 같은 한국 사회의 복잡한 상황과 시대적 배경, 그리고 정율성 개인의 상황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첫째, 한국전쟁 중에 북으로 망명한 경험이 있었던 점.

둘째,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의 활동이 어려웠던 점

셋째, 조선일보의 보도로 인한 명예훼손과 차별이 가중되었던 점

 

 이 사건은 한국 언론의 공정성과 책임성에 대한 중요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은 사회의 공적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한 기관으로서, 사실에 입각한 공정한 보도를 통해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사회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조선일보의 보도는 이러한 언론의 역할에 부합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율성의 월북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선은 정율성이 좌익 활동을 하다가 월북했다는 것이다. 이 시각은 조선일보의 보도가 정당했다는 입장이며, 정율성을 좌익 선동가로 규정했다. 이 시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정율성이 한국전쟁 중에 북으로 망명한 경험이 있었고, 남한에서의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좌익 활동을 했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시선은 정율성이 좌익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남한에서의 활동을 계속하고 싶었으나, 조선일보의 보도로 인해 월북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 시각은 조선일보의 보도가 부당했으며, 정율성을 좌익 선동가로 몰아세웠다는 입장이다. 이 시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정율성이 좌익 활동을 한 적이 없다는 증언이 다수 있으며, 조선일보의 보도로 인해 명예훼손과 차별을 당했기 때문에 월북을 선택했다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두 가지 시각은 정율성의 월북 원인에 대한 근거가 부족한 상태로,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정율성의 월북 사건은 한국 사회의 복잡한 상황과 시대적 배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진정한 월북 동기는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마치며

 

정율성은 분명 한국음악사에 남을 위인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업적과는 반대로 여러 가지 의문이 남는 행적또한 존재했다는 점도 사실이다. 이러한 양반된 행적을 남긴 인물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과거의 인물은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할 수도, 혹은 변명할 수도 없다. 다만 본인이 살아온 길과 행적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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